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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과학, 철학

침묵에게..

by sh1tb1og 2024. 11. 7.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편지를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거든요. 특히 이런 중요한 편지는 더더욱 그렇죠. 저는 늘 말이 서툴렀지만, 당신은 언제나 필요한 말들을 제때에, 부드럽게 건네주곤 했죠. 그래서인지 이번 편지도 잘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네요.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요. 비록 제 글이 서툴더라도, 이 말만큼은 전해야겠어요.
 
미안해요, 침묵이여. 당신을 떠나려 해요.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오히려 당신에게서 큰 위안을 받았고,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이 결정이 옳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 저를 이해해주길 바래요. 그동안 어떻게 이 결심에 이르게 되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요. 지난 몇 달간, 저는 제 안을 깊이 들여다보며 무엇이 저를 이토록 무겁게 만드는지 찾아왔어요. 이 공허함, 잔잔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무거운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싶었어요.
 
마치 씨앗이지만, 그 껍질을 깨고 나갈 수 없는 나무처럼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침내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죠.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진실이 거기 있었어요. 그 진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국 알아버렸어요. 당신이었어요, 침묵이여. 당신이 저를 억눌러 자라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거였어요.
 
이건 비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저에게 세상의 소음을 막아주는 보호막이었고, 덕분에 견딜 수 있었어요. 바깥세상은 가시덩굴로 가득했으니까요. 당신 없이는 아마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정말 감사해요.
 
그렇지만, 제 내면에서는 다시금 생명이 움트고 있었어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안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가두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삶, 그 속에서 피어날 저의 진정한 모습은 이제 당신과 함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제 저는 제 목소리를 되찾고, 무거운 침묵을 벗어나 그곳에 숨겨진 새싹들을 자라게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세상은 여전히 두려운 곳이에요. 모퉁이마다 가시가 있고, 한 걸음 내딛는 일조차 쉽지 않죠. 하지만 그런 세상을 나 홀로 마주할 수 있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평생 씨앗으로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자라고 싶어요.
 
그래서 이 편지를 써요. 왼손에는 담배를 들고, 눈물로 얼룩진 종이 위에 당신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언젠가 제 잎사귀가 빛을 받고 뿌리가 단단히 내리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제가 이 결정을 옳다고 느낄 거예요. 당신이 베풀어준 따스한 침묵의 품을 그리워할 날이 오겠지만, 이제 저는 제 목소리를 찾아 떠나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에 감사드려요. 이제부터는 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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