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1tb1og 2024. 9. 1. 15:00

2217년 11월 1일

 

승현에게,

 

당신은 7개월 전, 자율 로봇 병기의 오작동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로봇이 예기치 않게 우리 집으로 들어와 폭주했을 때, 당신은 방에서 일을 하던 중이었죠.

 

당신의 장례식을 치렀어요. 아주 장엄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가 겪은 너무 비극적인 결말이었죠. 그리고 당신의 유골을 받아 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책장 위에 올려두고 아침과 저녁으로 당신의 재에게 인사를 한답니다. 당신의 유골을 흩뿌렸다면, 이런 인사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말이죠. 당신의 옷 중 일부는 버렸지만, 나머지는 침대 옆에 두고 잠을 청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의 냄새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어요. 곧 그 냄새마저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하루를 보낸답니다.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술에 취하고, 밤이 되면 힉스 입자의 소멸을 지켜보죠. 이곳의 상황은 그대로예요.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속으로는 항복했지만요.

 

 

2217년 11월 2일

 

루미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면서도 기분 좋습니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 사라진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7개월 전 자율 로봇 병기의 오작동으로 폭발과 함께 생을 마감했어요. 그 로봇이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인 주거지역으로 날아왔었죠.

 

평소 당신의 요청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지 않고 묻었습니다. 오늘은 당신의 묘지를 방문해 묘비에 좋아하던 프리지아를 두고 왔어요. 집에 돌아와 당신으로부터 메시지가 왔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어쨌든, 이렇게 연락 주셔서 기쁩니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적 이상 현상의 초기 단계에 살고 있어서, 지금 이 현상을 글로는 설명하기 어렵네요. 동료에게 당신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그녀는 이것을 양자 얽힘의 간섭에서 비롯된 단순 오류라고 표현했습니다.

 

당신은 죽지 않았지만, 동시에 죽었군요. 그 로봇이 우리 집이 아닌 올바른 좌표로 날아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무섭게 다가옵니다. 다만 이쪽에서의 전쟁은 아주 먼 곳의 이야기로만 느껴져요. 몇 주 동안 힉스 입자의 관찰도 할 수 없고, 당신의 유골 항아리도 없지요. 메시지 고마워요. 잘 지내요.

 

2217년 11월 3일
 
승현에게,
 
키보드 앞에서 눈물을 참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당신이 답장을 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어요. 연구실의 당신 친구들은 우리 사이의 연결이 아마 몇 주 동안은 열려 있을 거라 했지만, 사실 이건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입자 통신기의 사용 허가를 받을 때, 당신을 찾더라도 제가 알던 세계선의 당신이 아닐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죠. 당신이 내가 아는 승현이 아닐지라도, 저는 당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그 말투는, 제 기억 속의 것과 닮았어요. 당신도 그런 존재이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발명한 이 이상한 기술이 무엇이든, 이제 이것이 당신의 유산입니다. 이쪽에서는 당신을 위대한 과학의 순교자처럼 표현하죠(웃음). 그리워요.
 
우리 고양이들은 더 이상 우리 침대에서 차지 않고, 문 앞에서 당신을 기다린답니다. 아직 당신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온답니다. 다음번 메시지와 함께 어떤 내용들이 있는지 알려드릴게요. 당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정말 좋습니다. 보고 싶어요.
 
 
2217년 11월 5일
 
루미에게,
 
아마도 당신은 이 장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쪽에선 전쟁이 여전하다고 했죠. 우리 쪽에서는 종전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지만, 이는 우리의 세계선의 연결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문 용어를 싫어하시는 당신에게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이 장비는 파동 함수 붕괴의 순간에 단일 입자를 중첩 상태로 사용합니다. 당신의 세계선과 내 세계선에 반씩 존재하는, 두 개의 갈라지는 우주 사이를 연결하는 끈 같은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우린 소통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입자의 파동 함수가 붕괴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선이 태어나죠. 마치 나무에서 새롭게 가지가 갈라지고 퍼져 나가듯, 새로운 우주가 생기고, 그 안에서 더 많은 입자가 이탈하며, 또 다른 가지처럼 새로운 세계로 나누어지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측정이 이것을 반복적으로 분열시켜 새로운 우주를 계속해서 만들어냅니다.
 
이건 단지 당신의 세계선과 내 세계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수십억 수십조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그중에는 우리가 행복한 세계도, 아예 서로를 알지 못하는 세계도, 전쟁 중에 우리 둘 다 죽인 세계선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경험한 세계가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우린 알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당신이 기억하는 승현은 슬랜더를 좋아했거나, 바다를 싫어했거나, 겨울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같은 세계의 존재가 아닙니다. 차갑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재의 기적은 그저 지금 한순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이건 소통의 기회가 아닌, 작별할 시기입니다. 제 부인은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당신의 책상 위 그 유골함에 있겠지요. 저는 당신의 승현이 아닙니다. 오늘, 저희 쪽 군은 엔셀라두스를 재탈환했습니다. 전쟁은 거의 끝났습니다. 메시지 감사드립니다. 평안하시길.

 

 

 

2217년 11월 5일
 
승현에게,
 
이 세계선에서는 당신이 슬랜더나 겨울을 좋아했어요. 이게 내가 생각하는 당신이라는 증거가 될까요?
 
이쪽에서 조금 다른 것도 있어요. 엔셀라두스는 이미 중성자탄의 폭발로 핵이 소멸하여 사라졌어요. 하지만, 단지 세계 역사일 뿐이지 우리와는 상관없잖아요?
 
전 우리가 가꾼 정원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우리의 정원, 함께 심은 겐티아나를 바라보며. 그리고 다른 세계선에서는 아마도 당신이 지금, 이 순간, 바로 제 허벅지에 기대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요. 당신이 이 기술을 만들었을 때, 이 기술이 무엇이든 간에,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싶었나요? 지금 이보다 더 나은 응용이 있을까요? 두 번째 기회? 우리는 단지 하나의 우주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잖아요? 이 기회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였었고, 서로 다른 죽음 후에도 또 함께잖아요. 제발.
 
 
2217년 11월 7일
 
루미에게,
 
미안하지만 우리 정원에는 겐티아나가 없습니다. 당신은 아직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당신의 세계선과 내 세계선의 유일한 차이가 고작 바람 한 줄기였다고 해도, 그 차이는 모든 것을 바꿉니다. 이곳의 과학 발전이 조금 더 뛰어난 탓에, 전쟁이 아예 없었던 세계선도, 힉스 붕괴로 인해 멸망해 버린 세계선의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애도의 말을 전하고, 자기장 수신기를 끄고 파동 함수를 붕괴시켜 연락을 끊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들과 더 자세히 대화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해줄 수 없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당신과 나는 다릅니다. 이곳은 하늘이 힉스 잔해로 터져버리는 곳이 아니에요. 전 당신이 또 다른 나를 잃은 세계의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왜 이런 기술을 만들었느냐고 물었죠. 공식적으로는, 코펜하겐 해석의 신봉자들을 엿 먹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공식적으로는, 우리 아이의 몸속에 있는 그 한 세포가 통제 불능 상태로 분열되지 않는 세계선이 적어도 하나는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아이를 암으로 잃지 않았던 세계를 찾았죠. 아이는 이제 13살입니다. 아이는 (이미 죽은 이쪽 세계의) 당신처럼 바보같이 감성적이며, 저처럼 굉장히 실용적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아이와 대화했습니다. 지금 당신과 내가 이렇게 대화하듯이요. 그 아이에게 당신이 그립다고 말했지만, 어떤 대답을 들었을까요? 아무 감정 없는 '글쿤'이었어요. 왜인지 아시나요? 그 아이에겐 제가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세계선에서는 당연히 멀쩡한 부모가 있고, 여전히 그 아이의 삶은 이어집니다. '글쿤'이라고 말한 이유는, 제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당신의 남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놓아주었습니다. 연결을 끊었지요. 그러니 당신도 저를 놓아야 합니다. 언젠가 이 기술이 완벽해지면, 인류는 새로운 진화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수억 개의 분리된 자아 중 하나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진화적 적응력, 우리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동시간대에 물리적으로만 분리된 하나로 존재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겠죠. 당신과 나는 아직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아요. 우리가 서로를 보는 시각은 금이 가고 왜곡된 거울을 속 세상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신은 제게 연락한 829번째 루미며, 이제는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당신이 다른 세계의 승현들과 연락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어쩌면 당신에게 조금 더 부드럽고 자상하게 말해주는 ‘내'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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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8년 03월 15일
 
존경하는 교수님께,
 
양자역학 분야의 철학 박사 학위와 노벨 과학상을 수여하게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박사 학위 수여가 지연된 점에 대해 사과드리며, 이 상황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특히, 교수님의 연구는 전통적인 학문을 넘어서는 독창성이 돋보였습니다. 평행 세계선에 있는 당신과 당신의 아내(들) 간에 이루어진 서신 교환은 매우 독특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우리 대학도 당신이 발명한 기술을 이용해 다른 세계선의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번 경험은 말 그대로 기이하면서도 매혹적이더군요. 저흰 이번 기술이 곧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관행이 될 것이며 인류의 진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만, 이러한 경험이 처음에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며, 필요에 따라 상담을 제공해 줄 상담사들과 정부와의 긴밀한 협력으로 타 세계선과의 양자통신을 담당하는 부서가 설립될 수 있도록 협조할 것입니다.
 
박사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실 때, 차를 가져오신다면 C동에 위치한 주차장, 8번부터 21번까지의 공간에 주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수여식 후에는 작은 만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사모님과 함께 오신다면 미리 알려주십시오. 2인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저희 지구에, 문명에,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도움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